[한국일보] “성폭력 고통 딛고 피해자 돕는 멘토로 다시 태어나”

‘서울해바라기센터’ 에 가보니 피해자들 증거 채취ㆍ치료 후 전문 의료진의 심리 상담에 재판 지원까지 원스톱 서비스 통합지원센터 전국에 12곳 뿐 지방 거주자들 이용에 큰 불편 직원들 낮은 처우 등도 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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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꼭 해바라기센터에 왔어요. 상담을 받으면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해바라기센터에서 만난 A(23)씨.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아버지로부터 12년간 성폭력을 당해 온 A씨의 삶은 이 센터에 오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너무 어려서 시작된 폭력이라 ‘나쁜 짓’인지조차 몰랐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가족과 함께 살 수 없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 일을 입밖에 내지도 못했다. 환각 환청 증세까지 겪게 되자 고3 때인 2011년 주변의 도움으로 센터를 찾았다. A씨는 센터를 위탁 운영하는 서울대병원에서 정신과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며 차츰 회복했고, 6년째인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한번씩 상담을 받고 있다. 대학생인 A씨는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있는데 60%정도 완성됐다”며 “영화가 완성되면 음악을 공부해 오케스트라 지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변한 건 A씨만이 아니다. A씨의 어머니 B(46)씨는 처음 사실을 알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엄마가 바로 서야 아이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센터의 조언대로 상담을 받으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딸의 회복을 도왔다. 센터의 법률 지원을 받아 가해자인 남편을 고소, 그는 현재 1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이젠 다른 친족 성폭력 피해 가족의 멘토 역할을 해주는 B씨는 “늦은 나이지만 대학에 입학해 청소년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며 “내 딸과 다른 성폭력 피해 가족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며 웃었다.

 

증거 채취부터 심리치료까지 원스톱 지원

상처를 입었어도 해바라기처럼 해맑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의 해바라기센터. 이곳은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자에게 상담 및 심리치료, 의료ㆍ수사 지원 등을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성폭력 지원기관이다. 연령 성별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365일 24시간 운영된다.

성폭력을 당해 센터에 오면 증거 채취와 치료를 위해 가장 먼저 산부인과 진료실로 가게 된다. 의료진은 ‘성폭력 증거채취 응급키트’를 이용해 가해자의 피부조직 및 혈액 등이 남아있을지 모를 피해자 손톱 등 증거를 채취한다. 증거 채취는 피해 부위별로 10단계에 걸쳐 꼼꼼히 진행된다. 우경래 서울해바라기센터 의료지원팀장은 “증거 확보를 위해서는 몸을 씻지 말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72시간 내에 오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소변도 가급적 참고, 구강 피해의 경우 음료수나 음식물도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72시간 내에 와야 증거를 확보할 확률이 높고, 임신을 막기 위한 사후피임약의 효과도 크다.

이어 진술녹화실에서 여성 경찰관에게 피해 진술을 하면 별도의 모니터실에서 진술분석관과 속기사가 진술 기록과 분석을 한다. 과거 산부인과의원이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증거 채취를 거부하거나, 경찰서에서 진술하는 동안 수치심을 느끼는 등 2차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긴급 대응이 끝나면 센터는 정신적인 문제를 평가하고 피해자의 특성에 맞춰 심리치료와 상담을 이어간다. 서울해바라기센터의 심리치료실은 아동 청소년이 모래놀이를 할 수 있도록 갖가지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센터는 또 가해자 고소 및 재판 등 법률문제도 지원하며, 지원에 드는 비용과 각종 치료비는 무료다. 이런 원스톱 지원을 위해 서울해바라기센터에는 상담사 의료진 심리전문가 등 전문가 19명과 서울지방경찰청에서 파견 나온 여경 5명이 상주하고 있다.

 

열악한 처우로 고급인력들 떠나

해바라기센터는 폭력 피해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지만, 전국 곳곳에 촘촘히 있지는 않다. 현재 총 36개소가 있는데, 서울(5개소)과 경기(5개소)를 제외한 다른 광역지자체는 1~3개 정도다. 충남 대전 울산 제주에 1개씩, 강원 경남도 2개뿐이라 중소도시 거주자는 센터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또 서울해바라기센터처럼 수사ㆍ의료ㆍ심리 등 모든 지원을 해주는 ‘통합형’은 12개소뿐이다. 피해자 긴급지원에 초점을 맞춘 ‘위기지원형’이 16개소, 19세 미만 아동을 심리치료 중심으로 지원하는 ‘아동형’이 8개소다. 여성가족부가 민간에 위탁해서 운영하다 보니 운영주체 및 지역 별로 전문성이나 서비스의 편차가 커 지방에 거주하면서도 서울 센터로 오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센터 직원에 대한 낮은 처우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의료ㆍ상담ㆍ심리ㆍ수사를 지원하는 전문인력이 2,3교대로 상주하는데 급여는 월 200만원 남짓이고, 고용도 불안정하다. 열정을 갖고 일을 시작한 고급인력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정명신 서울해바라기센터 상담지원팀장은 “성폭력의 70%가 지인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경우가 많다”며 “이런 피해자들과 신뢰를 쌓고 지속적으로 지원해주려면 직원들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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