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이 설계·작동시킨 모든 ‘위력’
_작성자: 리사
안녕하세요. 리사입니다. 저는 페미니스트, 여성, 법학도이고, 빻은 법을 배우면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안희정 사건과 관련하여, 도지사가 수행비서(피해자)에 대해 가지는 법적인 위력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재판부가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합니다.
피고인은 도청 내에서나 피해자에 대해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에 기초한 위력을 일반적으로 항시 행사해 왔다거나 이를 남용하는 등 이른바 ‘위력의 존재감’ 자체로 피해자나 기타 주변 직원 등의 자유의사를 억압해왔다고 볼만한 증거는 부족하다.
지난 8월 13일, 마지막 선고 공판에서 조병구 판사는 안 전 도지사가 가지고 있던 위력이 피해자의 저항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인 위력이 직접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흔히 법에서 말해지는 ‘위력’이란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만한 힘을 말합니다.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도 ‘위력’이 될 수 있는데,
피해자는 피고의 전 수행비서로 법적인 지위는 ‘지방공무원>특수경력직공무원>별정직공무원’이었습니다. [지방공무원법]은 지방공무원들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고 신분을 보장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수행비서’라는 자리는 이 법 제 2조에 따라 엄연히 ‘공무원’으로 불리지만 사실상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무원과는 다릅니다. ‘별정직 공무원’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입니다.
- [지방공무원법]
제3조 (적용범위)
① 특수경력직공무원에 대하여는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으면 제31조, 제41조제1항, 제42조부터 제46조까지, 제46조의2, 제46조의3, 제47조부터 제51조까지, 제51조의2, 제52조부터 제59조까지, 제61조, 제74조부터 제79조까지, 제82조 및 제83조에 한정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
위와 같이 [지방공무원법]만으로는 안 전 도지사가 별정직 공무원인 수행비서에 대해 가지는 위력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별정직공무원에게는 [지방공무원법]의 극히 일부만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 제2조 (공무원의 구분)
④ 제3항에 따른 별정직공무원의 임용조건, 임용절차, 근무 상한연령,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 또는 조례로 정한다.
이 법 제2조4항에서 별정직공무원에 대해 대통령령 또는 조례로 위임하고 있어 [지방별정직공무원 인사규정]을 찾아보았습니다.
- [지방별정직공무원 인사규정]
제 3조(임용권자)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이 영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소속 별정직 공무원의 임명, 휴직, 면직과 징계를 하는 권한 (이하 임용권이라 한다)을 가진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지사는 수행비서의 임명부터 휴직, 면직(=해고)과 징계 등 모든 임용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지사가 임기를 마치거나 스스로 그만두면 당연히 그 수행비서 또한 면직됩니다. 다시말해, 피해자의 현재 경력과 미래 경력을 모두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을 법이 부여한 것입니다.
- 제9조(근무성적평정) ① 임용권자는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소속 지방별정직공무원의 근무성적을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평정하여야 하며, 그 결과를 보수·임용 등 각종 인사관리에 반영할 수 있다.
② 지방별정직공무원의 근무성적평정에 관하여는 「지방공무원 임용령」 제31조의2부터 제31조의4까지, 제31조의6, 제31조의7 및 제32조를 준용한다.
③ 제1항과 제2항에서 규정한 사항 외에 지방별정직공무원의 근무성적평정에 필요한 사항은 임용권자가 해당 기관의 직무특성 등을 고려하여 따로 정할 수 있다.
별정직 공무원은 다른 지방직 공무원과 다른 기준으로 평가받습니다. 심지어 이 또한 그의 임용권자인 도지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보수도, 승진도, 모든 인사관리에 도지사가 영향을 줍니다. 누구를 수행비서로 임용할지부터 비서가 언제 휴직을 할 수 있는지, 보수를 얼마나 받을지, 다른 자리로 임용될 수 있는지, 어떤 징계를 내릴 수 있는지, 근무평가를 어떻게 할지, 언제 그만둘지까지 모든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바로 임용권자, ‘도지사’ 입니다.
재판부는 피해자를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엘리트 전문직 여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정직 공무원인 수행비서직의 피해자가 과연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나요? 수행비서직의 취약함을 만든 것은 법입니다. 법은 피해자가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도 보장받기 힘든 사각지대에 두었습니다. 임용권자의 손에 무기 쥐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좁은 방 안에 무기를 든 자와 피해자를 단 둘이 밀어 넣은 것도, 법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너는 엘리트 전문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니까 거부 의사를 명확히 표현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위력의 칼날이 단 한번도 ‘중년 남성 판사’인 당신을 향해 날 세워진 적이 없어서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피해자가 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쭉 그럴 일 없는 남성의 경험칙에 입각하여 피해 여성의 경험칙을 엉터리로 넘겨짚어 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운전비서와의 갈등상황에서 드러나다시피 피해자는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하기 까지 합니다. 한국의 판사가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마치 일반 범죄의 전과처럼 다루는 일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너 이전에 불편하다고 문제제기 한 적 있잖아? 그때는 했는데 왜 이때는 못했어?”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판사가 피해 경험을 전과 취급하는 탓에, 지속적으로 성폭력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피해자의 환경은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법이 피해자를 사각지대로 몰아 넣었고, 법이 가해자에게 위력이라는 무기를 쥐어줬고, 다시 “너는 진짜 피해자가 아니야”라는 2차 가해까지 법정에서 ‘법’을 핑계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원석, “[국회 ‘김 비서’는 지금③] 성범죄 ‘사각지대’ 보좌진은 ‘참을 인(忍)’만…”, 『THE FACT』, 2018.8.22
그리고, 여전히 사각지대에 몰린 수 많은 김 비서들이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6~9급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종사하고 있고,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임용권자에게 자신의 평판과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내몬 것은 법입니다. 마냥 뒷짐지고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묻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전 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아무래도 이런 맥락을 살필 능력 마저 부족했나 봅니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법원, 국회, 정부 모두에게 있습니다. 여성 별정직 공무원들의 노동권과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입법 운동을 보여야할 국회, 공무원법의 하위 시행령을 책임지고 있는 행정안전부와 그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 취약한 법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살펴야할 사법부는 이제 그 뒷짐 좀 풀고, 여가부에게만 삿대질하는 손도 좀 내리고 해야할 일을 하세요.